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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아버지와 끝없는 고립,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 '하이 라이프'

by 미잉이 2025. 9. 18.

클레어 드니 감독의 '하이 라이프'는 2019년 공개된 프랑스-독일-영국 합작 SF 드라마 영화로, 전통적인 우주 영화와는 달리 인간의 본능, 성, 죽음, 그리고 고독이라는 원초적 주제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인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처럼 화려한 특수효과나 웅장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지 않고, 대신 우주라는 고립된 공간을 무대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극한까지 밀어붙입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주연을 맡아 차갑지만 내면 깊은 상처를 지닌 인물 ‘몽테’를 연기했으며, 줄리엣 비노슈, 미아 고스 등 개성 강한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여 영화에 독특한 무게감을 더했습니다. 영화는 일부 관객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과감한 설정과 이미지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그만큼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울림을 남긴 문제작으로 평가됩니다.

 

죄수들의 우주 여정과 끝없는 고립, 영화 '하이 라이프'의 줄거리

영화는 어린 딸과 함께 우주선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남자 몽테(로버트 패틴슨)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서 홀로 아기를 돌보고 있으며, 한때 동승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 고립된 현재의 장면과 과거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영화는 전개됩니다.

몽테를 비롯한 동료들은 사실 모두 지구에서 사형수 혹은 중범죄자로 선고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유의 대가로 위험천만한 우주 실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임무는 블랙홀 근처에서 에너지원 추출 가능성을 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임무의 진짜 목적은 과학적 호기심에 가까웠고, 사실상 이들은 사회로부터 버려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우주선 안에서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관리뿐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욕망이 억눌린 채 조금씩 분출되며 갈등이 심화됩니다. 특히 의학자이자 프로젝트 책임자인 딥스 박사(줄리엣 비노슈)는 극단적인 실험을 통해 인간의 생식 능력을 탐구하고자 하며, 다른 승무원들을 피험자로 삼습니다. 그녀는 성적 충동과 생식의 문제를 과학적 실험이라는 명분으로 조작하고, 그 과정에서 승무원들은 점점 파괴적이고 위험한 상황에 빠집니다.

몽테는 처음에는 성적 욕망조차 억누르고 금욕적인 태도로 살아가지만, 딥스 박사와 다른 인물들의 실험과 갈등 속에서 결국 인간적인 욕망과 고독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료들은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하거나 광기에 빠져 사라지고, 결국 몽테는 어린 딸 윌로우와 단둘이 남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아버지와 딸이 블랙홀을 향해 다가가는 장면으로, 관객에게 결말에 대한 해석을 맡기며 열린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고독한 아버지와 광기에 사로잡힌 과학자

몽테(로버트 패틴슨)는 영화의 중심인물로 과거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지만 우주선 안에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점차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금욕적이고 차갑게 보이지만, 딸을 지켜내려는 강한 책임감과 동시에 존재론적 허무에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딥스 박사(줄리엣 비노슈)는 우주선 실험의 총책임자로, 과학적 명분으로 포장된 실험을 통해 인간의 성과 생식을 탐구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죄책감과 상실감이 숨어 있으며, 그 집착이 실험에 광기 어린 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녀는 우주선의 다른 인물들을 무너뜨리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는 연구자적 면모를 보여줍니다.

보이즈(미아 고스)는 젊고 충동적인 승무원으로, 실험과 갈등 속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녀는 코엔과 달리 욕망과 본능에 솔직하지만, 결국 우주선 내 긴장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윌로우(제시 로스)는 몽테의 딸로, 우주선 안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세대의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몽테가 삶을 이어갈 이유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블랙홀을 향해 다가가는 장면은 몽테와 윌로우의 관계를 인간 존재의 의미와 맞닿게 만드는 핵심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불편한 우주극

첫째, '하이 라이프'는 단순한 SF 모험담이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인간이 왜 살아가야 하는지, 고립된 상황에서 인간의 본능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철저히 파고들며,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을 통해 오히려 인간의 덧없음을 드러냅니다.

둘째,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영화의 진중한 분위기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그는 대사보다 눈빛과 몸짓으로 내면의 불안과 절망,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표현하며 이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깊이를 보여줍니다.

셋째, 클레어 드니 감독 특유의 연출은 서정성과 잔혹함을 동시에 담아냅니다. 극단적인 성적 이미지와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자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인간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울림을 줍니다.

넷째, 영화의 시각적·음향적 요소는 특수효과보다 미니멀리즘을 선택해 우주의 고요와 무중력 속 고립감을 더욱 강렬히 전달합니다. 배경음악과 침묵의 대비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다섯째,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중심축으로 삼아 차갑고 고독한 우주 속에서 작은 온기를 보여줍니다. 이 서사는 무의미와 허무 속에서도 인간적인 사랑과 연결이 결국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감독의 시선을 담아냅니다.

 

 

'하이 라이프'는 결코 대중적인 영화는 아닙니다. 난해하고 불편한 장면들이 많으며, 단순한 플롯이나 오락적 재미를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당혹스러운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오히려 그 불편함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 본능과 고독, 그리고 삶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야심 찬 시도를 보여줍니다.

몽테와 딸 윌로우가 마지막에 블랙홀을 향해 다가가는 장면은 죽음을 향한 항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출발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관객에게 뚜렷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열린 질문을 남깁니다.

따라서 '하이 라이프'는 일반적인 SF 영화의 틀을 벗어나 철학적 사유를 자극하는 작품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깊이 고민해보고 싶은 관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고립과 허무, 욕망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다루지만, 결국 남는 것은 우주적 고독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인간성의 불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