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만 로맨스(2021)'는 단순한 멜로 영화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엔 제목처럼 ‘로맨스’일 것 같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로맨스, 코미디, 가족극, 성장극까지 아우르는 복합장르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특히 그 안에는 현대인의 관계, 소통, 자아, 상처와 회복이라는 키워드가 버무려져 있어 단순히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뜻밖의 공감과 여운을 남깁니다.
감독 조은지는 본래 배우로 활동하다 연출로 방향을 넓힌 인물로, '장르만 로맨스'를 통해 관계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따뜻하면서도 솔직하게 그려냅니다. 여기에 류승룡, 오나라, 김희원, 성유빈, 이유영, 무진성까지 개성 강한 배우들이 출연해 유쾌하면서도 진심 어린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이 영화는 잘난 척하지만 엉뚱하고, 성공했지만 공허한 한 남자의 일상에 여러 ‘장르’의 인물이 뒤엉키며 벌어지는 해프닝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글을 쓰지 않는 작가, 세상은 작가를 가만두지 않는다
한때는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지금은 창작의 슬럼프에 빠진 한남(류승룡)은 이혼한 아내 미애(오나라)와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아들 성경(성유빈)과도 미묘한 거리감을 두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혼은 했지만 이웃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러나 어딘가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일상은 겉보기에 평온하지만 그 속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묻어 있습니다.
어느 날 한남은 자신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젊은 작가지망생 유진(무진성)을 만나게 되고, 그의 열정과 실력을 보고 대필 제안을 하게 됩니다. 유진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기회를 잡기 위해 한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들의 공동작업은 점차 본격화됩니다.
그러던 중 한남의 삶에 또 다른 변수들이 등장합니다. 과거의 문하생이자 작가 후배 순모(김희원)가 갑자기 미국에서 돌아오고, 성격은 괴팍하지만 감정은 솔직한 순모는 한남과의 과거 관계를 정리하려 하지만, 여전히 엉킨 감정선 속에서 오히려 갈등을 더합니다. 여기에, 유진의 과거와 정체, 그리고 그가 감춰온 비밀이 드러나면서 한남의 일상은 ‘로맨스’가 아닌 ‘스릴러’, ‘가족 드라마’, ‘성장 영화’로 바뀌어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각 인물은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고, 때로는 감싸주며, 우연과 의도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의 장르’를 만들어갑니다. 한남은 유진의 삶을 통해 아들의 내면을 비로소 들여다보게 되고, 미애와는 과거의 감정을 다시 마주하며, 순모와는 뒤늦은 용서를 시작하게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관계의 끝에서 한남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유진 역시 자신의 상처를 글로 풀어내며, 성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인물 간의 변화와 회복을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으로 그려내며 마무리됩니다.
익숙하지만 낯설고, 유쾌하면서도 뭉클한 그들만의 이야기
한남(류승룡)은 성공한 작가였지만 지금은 슬럼프에 빠진 인물로,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정작 감정 표현에는 서툰 사람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 두기를 유지하며, 마치 세상을 관찰자처럼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 있는 외로운 인간상입니다. 류승룡은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진지함을 오가는 연기로 이 복잡한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그려냅니다.
미애(오나라)는 한남의 전 부인이자 이웃, 친구 같은 존재입니다. 이혼 후에도 한남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설정은 다소 현실적이지 않지만, 이혼 후에도 완전히 끝낼 수 없는 감정선을 유쾌하고 현실감 있게 보여줍니다. 오나라는 특유의 매력으로 씩씩하면서도 쿨한 캐릭터를 완성합니다.
유진(무진성)은 작가 지망생으로 등장하지만, 그가 가진 사연은 영화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순수함과 복잡한 내면을 동시에 지닌 캐릭터로, 그가 한남에게 끼치는 변화는 단순한 제자-선생의 관계를 넘어, 세대 간의 이해와 감정의 확장을 상징합니다.
성경(성유빈)은 한남과 미애의 아들이며, 아버지를 동경하면서도 거리감을 두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말수는 적지만 섬세하고,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방황합니다. 성유빈은 절제된 연기로 청춘의 복잡한 감정을 잘 표현합니다.
순모(김희원)는 감정에 충실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겉보기엔 까칠하지만 누구보다 정직한 인물입니다. 그의 등장은 영화에 유쾌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한남과의 관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냅니다.
‘로맨스’는 사람 사이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감정이다
'장르만 로맨스'는 로맨스를 매개로, 사람 사이의 오해와 이해, 거리와 다가섬, 상처와 회복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인간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각 인물들은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때로는 밀어내고, 결국엔 포용하면서 성장합니다. 영화 속 '로맨스'는 연인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부자 관계, 친구, 후배, 동료 사이에도 존재하는 폭넓은 감정의 교차점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쾌한 대사와 위트 있는 상황 설정, 그리고 배우들의 찰떡같은 호흡은 영화 전체에 편안한 웃음과 따뜻한 분위기를 유지하게 만들어줍니다. 특히 류승룡과 김희원의 티키타카, 류승룡과 무진성의 거리감 있는 눈빛 교환 등은 관계를 설명하기보다 느끼게 해주는 연출로 인상 깊습니다.
'장르만 로맨스'는 제목처럼 로맨스를 기대하고 보면 조금 놀라고, 끝까지 보고 나면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장르’가 아니라 ‘관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작품입니다. 누구나 관계 안에서 상처를 받고, 외롭고, 때로는 비겁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장르’를 통틀어 ‘로맨스’라 부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진심 어린 시선으로 풀어냅니다. 무거운 주제도, 가벼운 농담도 다 이 영화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결국 우리는 한 줄의 로맨스를 쓰듯, 매일 누군가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