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Eternals, 2021)'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페이즈 4를 여는 의미 있는 작품 중 하나로, 기존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다른 신적 존재 ‘이터널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서사시적 슈퍼히어로 영화입니다.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클로이 자오(Chloé Zhao)가 연출을 맡았으며, 안젤리나 졸리, 리차드 매든, 젬마 찬, 쿠마일 난지아니, 셀마 헤이엑, 마동석 등 다양성과 규모 면에서 역대급 캐스팅을 자랑합니다.
마블의 기존 영웅들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초능력자들이었다면, 이터널스는 우주적 존재인 셀레스티얼(Celestials)에 의해 창조된 불사의 종족으로, 수천 년 동안 인류의 곁에서 조용히 문명을 지켜봐 온 인물들입니다. 이 작품은 히어로물이라기보다 철학적 주제와 감정의 깊이, 인류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서정적인 SF 영화에 가깝습니다.
수천 년간 침묵한 신들의 귀환, '이터널스'의 줄거리
수천 년 전, 거대한 우주적 존재인 셀레스티얼 아리셈은 태초의 에너지와 생명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창조한 ‘이터널스’를 지구로 파견합니다. 그들의 임무는 인간을 위협하는 디비언츠(Deviants)라는 괴생명체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터널스는 고대 문명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 속에 숨어 지내며 자신들의 존재를 감춰왔습니다. 하지만 ‘어벤져스’의 스냅 이후, 인류의 절반이 돌아오면서 지구에는 갑작스러운 에너지 변화가 발생하고, 이는 새로운 셀레스티얼의 탄생을 의미하는 ‘임파전스(Emergence)’를 유발합니다.
이로 인해 잠들어 있던 디비언츠가 부활하고, 수천 년간 흩어져 지내던 이터널스는 다시 한자리에 모여야만 합니다. 이들의 리더였던 아약은 디비언츠와의 전투 도중 사망하게 되고, 후계자로 세르시가 선택되면서 이터널스는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터널스는 단순히 디비언츠와 싸우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셀레스티얼의 탄생을 돕기 위한 장기적 계획의 일부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며 내부의 분열이 시작됩니다. 이 중 일부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셀레스티얼의 계획을 막으려 하고, 또 다른 일부는 창조주의 뜻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터널스는 각자의 능력과 감정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하게 되며, 신과 같은 존재들이 인간처럼 갈등하고 선택하는 모습은 영화의 가장 큰 서사적 핵심이 됩니다. 마지막에는 세르시와 동료들의 희생과 연대로 인해 셀레스티얼의 탄생이 막아지고, 그 여파로 아리셈은 이터널스를 데려가 인류를 심판하겠다고 예고하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초월적 존재이자 인간적인 고민을 안은 등장인물들
영화의 중심 인물인 세르시는 물질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닌 이터널스로,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리더였던 아약의 뒤를 이어 팀을 이끄는 인물이 되며, 인류를 지키기 위해 셀레스티얼의 계획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이카리스는 비행과 레이저 발사 능력을 지닌 강력한 전사로, 이터널스 중 가장 전통적인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임무를 중시하고 원칙에 충실하려 하지만, 세르시에 대한 사랑과 셀레스티얼의 뜻 사이에서 깊은 내적 갈등을 겪으며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초기의 리더였던 아약은 셀레스티얼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 오랜 시간 동안 이터널스의 중심을 잡아온 존재입니다. 인류의 가능성과 감정을 이해하게 되며 결국 그들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뜻을 바꾸지만,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희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테나는 전투 능력이 뛰어난 전사로, 창조주의 기억이 쌓이며 정신이 불안정해지는 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억제하고 동료들을 위해 싸우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녀는 동료 길가메시의 헌신적인 보호 속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갑니다.
길가메시는 엄청난 괴력을 가진 전사로, 테나를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온 충직한 동료입니다.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팀 내에서 안정감을 주며, 이터널스가 가족처럼 뭉칠 수 있는 중심축 역할을 합니다.
드루이그는 사람들의 의식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인류가 저지르는 폭력과 전쟁을 방관해야만 하는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팀에서 벗어나 살아가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누구보다 강한 신념으로 복귀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합니다.
파스토스는 기술 창조 능력을 가진 이터널스로, 한때 인류의 진보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인류가 기술을 전쟁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조용한 삶을 선택하지만, 팀을 위해 다시 나서며 감정적 깊이를 보여줍니다.
마카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를 돌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를 가진 이터널스로, 청각장애인 캐릭터임에도 강인하고 밝은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녀는 지식과 유물을 사랑하며, 조용하지만 강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킹고는 손에서 에너지 구체를 발사하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현대에는 발리우드 스타로 위장해 살아가며 이중생활을 즐깁니다. 겉으론 유쾌하고 허세 가득한 인물이지만, 내부의 갈등 앞에서는 깊은 고뇌를 드러내며 영화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추천 포인트: 서사적 깊이와 다양성, 새로운 마블의 지평
'이터널스'는 기존 마블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정적인 분위기, 철학적인 주제, 인간 내면에 대한 탐색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들의 전투와 스펙터클 중심이 아닌, 선택과 희생, 운명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클로이 자오 감독의 시적인 연출과 자연광을 활용한 화려하지만 조용한 영상미는 마블 영화에서 보기 드문 미장센을 만들어내며,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욱 부각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다양성과 포용성 면에서 MCU 역사상 가장 전진적인 영화입니다. 여성 리더, 아시아인 중심 캐릭터, 청각장애인 슈퍼히어로, 동성애자 캐릭터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세계관의 보편성과 현대적 가치를 담아냅니다.
마블 특유의 유머는 줄어든 대신, 엄숙함과 무게 있는 전개, 그리고 인간적인 고민과 결단이 강조되며, 이로 인해 슈퍼히어로 영화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도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터널스'는 단순히 새로운 히어로들을 소개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서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불멸의 존재들이 결국 ‘인간’의 가치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늘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공감, 희생, 선택, 연대)의 소중함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비록 대중적인 재미보다 철학적 사유가 강조되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마블이 슈퍼히어로 장르를 예술적이고 성숙한 방향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한 작품입니다.
'이터널스'는 어쩌면 당장은 낯설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마블의 실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MCU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예술적 담론까지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한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