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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실험 속 무너지는 질서, 인간 군상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영화 ‘보이저스‘

by 미잉이 2025. 9. 19.

닐 버거 감독의 '보이저스'는 2021년 공개된 미국 SF 스릴러 영화로, ‘우주 개척’이라는 거대한 배경 아래 사실상 인간 본능과 사회적 규범 사이의 갈등을 탐구하는 실험극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영화는 먼 미래 인류가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기 위해 거대한 우주선을 보내는 설정에서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생존과 질서, 욕망과 폭력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군상의 축소판을 보여줍니다. 화려한 특수효과보다는 밀폐된 우주선 내부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권력 다툼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의 SF 버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타이 쉐리던, 릴리 로즈 뎁, 핀 화이트헤드 등 젊은 배우들이 출연해 세대적 갈등과 본능적 충동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우주라는 배경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극단적으로 탐구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항해, 그리고 무너지는 질서

영화의 배경은 머지않은 미래, 지구의 환경이 점점 악화되어 더 이상 인류가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거주 행성을 찾아 개척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항해할 우주선을 준비하고, 임무를 완수할 세대를 직접 키워내는 방식으로 승무원을 구성합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공적으로 길러진 아이들이었고, 유전자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갖추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토퍼(타이 쉐리던), 셀라(릴리 로즈 뎁), 자크(핀 화이트헤드)와 동료들은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통제된 환경에서 자라나 감정과 욕망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블루’라 불리는 약물을 매일 복용하며 공격성, 성적 욕망, 자율성을 억제당한 채 무미건조하게 생활했는데, 이는 임무의 성공과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와 자크는 어느 순간 이 약물이 단순한 영양제가 아니라 감정을 억누르는 억제제임을 알게 되고, 이를 몰래 끊게 됩니다. 약물 복용을 멈춘 그들은 처음으로 본능적 충동을 경험하게 되고,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욕망, 두려움, 쾌락, 권력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크는 점점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다른 승무원들을 선동해 크리스토퍼와 갈등을 빚습니다.

우주선 안에서 점차 질서는 붕괴되고, 두 세력으로 갈라진 아이들은 서로 불신과 증오 속에 대립하게 됩니다. 과학적 탐사라는 원래 목적은 사라지고, 누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지배할 수 있는가의 싸움으로 변질됩니다. 셀라는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하지만,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인간 본능의 잔혹한 민낯과 무질서의 공포가 드러납니다. 결국 영화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길과, 인류가 문명과 본능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결말을 맞이합니다.

실험 속 인간 군상의 축소판

크리스토퍼(타이 쉐리던)는 침착하고 책임감 있는 성격으로, 우주선 내에서 점차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 본능을 억누르는 약의 정체를 깨닫고 이를 끊으며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되지만, 동시에 무너지는 질서 속에서 책임과 도덕성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입니다.

셀라(릴리 로즈 뎁)는 우주선 내에서 유일하게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로, 혼돈 속에서도 이성과 공감을 유지하며 갈등을 중재하려 합니다. 그녀는 본능적 욕망과 질서 유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결국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심적 역할을 맡습니다.

자크(핀 화이트헤드)는 억눌린 본능이 폭발하면서 점차 폭력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인물로 변해갑니다. 그는 두려움과 욕망을 힘으로 해결하려 하며, 다른 승무원들을 선동해 독재적 지배를 시도합니다. 그의 캐릭터는 억압된 사회에서 욕망이 무너질 때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적 잔혹함을 대변합니다.

그 외에도 다른 승무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욕망과 두려움을 드러내며, 집단 속 개인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길러졌지만, 결국 그 안에서도 인간성의 다양한 모습이 발현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우주적 실험

첫째, '보이저스'는 단순한 우주 탐사 영화가 아니라 인간 본능과 사회 질서에 대한 철학적 우화입니다. 고립된 환경에서 억눌린 욕망이 어떻게 터져 나오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며, 우리가 문명을 유지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둘째, 영화의 설정은 현실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인간이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이어지는 임무를 맡겨야 할 경우, 실제로는 이런 세대교체형 탐사가 필요하다는 과학적 상상력이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단순히 SF적 상상에 그치지 않고, 윤리와 생존의 문제로 확장시킵니다.

셋째, 젊은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몰입감을 높입니다. 타이 쉐리던은 책임감과 고뇌를 담은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릴리 로즈 뎁은 흔들리면서도 끝내 인간성을 지키려는 인물을, 핀 화이트헤드는 권력에 취한 폭력적 리더의 변화를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넷째, 영화는 밀폐된 우주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통해 극도의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화려한 우주 전투나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공포와 욕망이 더 큰 스릴을 선사합니다.

다섯째, 이 영화는 청소년기와 성인의 경계에서 겪는 혼란을 상징적으로 다루며, 성장 드라마와 철학적 실험극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장르적 매력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미래 사회의 이야기라기보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사회와 인간 본성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보이저스'는 전통적인 오락적 SF 영화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한 작품입니다. 우주 개척이라는 거대한 배경은 사실 인간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뿐이며, 영화의 진짜 초점은 “우리는 과연 본능을 통제하지 않고도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크리스토퍼와 셀라가 보여주는 책임감과 인간성, 자크가 드러낸 폭력과 권력욕은 결국 인류가 반복해 온 역사의 축소판입니다. 영화는 특정한 해답을 주지 않고, 오히려 관객에게 이 질문을 던지며 여운을 남깁니다.

따라서 '보이저스'는 단순한 SF 스릴러로 소비되기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만합니다. 화려한 액션과 자극적인 볼거리를 기대한다면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를 찾는 이들에게는 깊은 생각거리를 선사합니다.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도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