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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지 않은 진실과 인간의 심리, 미스터리와 심리극의 영화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by 미잉이 2025. 6. 3.

2023년 개봉한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A Haunting in Venice)'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한 ‘에르퀼 포와로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입니다. 이번 작품은 전작들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나일 강의 죽음'에 이은 케네스 브래너 감독 겸 주연의 미스터리 추리극으로, 익숙한 추리의 틀 안에 고딕 호러와 오컬트의 요소를 섞어 새로운 분위기를 시도한 것이 특징입니다.

기존 작품들이 비교적 클래식한 미스터리 구조를 택했다면,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그보다는 훨씬 어둡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전개되며, 베니스의 신비롭고 음산한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해 '과연 이 사건은 귀신의 짓인가, 아니면 인간의 범죄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포와로라는 명탐정이 전면에 나서면서도, 이번 영화에서는 그의 논리적 추리보다는 심리적 갈등과 믿음의 경계가 더욱 부각되며, 인물들의 내면에 숨겨진 감정까지도 치밀하게 파고드는 서사가 인상적입니다.

 

은퇴한 명탐정, 초대받지 않은 진실과 마주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한 에르퀼 포와로(케네스 브래너)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조용히 은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건을 수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는, 배를 타고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살아가는 고독한 노년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친구이자 미스터리 작가인 아리아드네 올리버(티나 페이)가 찾아와, 베니스의 한 오래된 궁전에서 열리는 할로윈 밤 심령술 행사에 동행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그녀는 이 심령술이 사기임을 포와로가 밝혀줬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그를 설득하고, 포와로는 마지못해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됩니다.

행사 장소는 고풍스러운 궁전으로, 과거에는 고아원을 겸하던 공간이었고,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절 수많은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기괴한 전설과 유령의 소문이 깃든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유명한 심령술사 조이스 레이놀즈(미셸 여)가 죽은 소녀의 영혼을 소환하겠다며 의식을 진행하지만, 그 자리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조이스 레이놀즈가 의식을 마친 후, 수상한 상황 속에 살해되고, 궁전은 외부와 고립됩니다.

포와로는 사건의 중심에 놓이게 되고, 참석자 전원이 의심받는 가운데 다시금 탐정으로서의 직감을 되살리며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궁전에는 주인인 오페라 가수 로웨나 드레이크(켈리 라일리), 죽은 소녀의 약혼자, 의심스러운 의사,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하녀, 그리고 몇몇 수상한 인물들이 함께 머무르고 있으며, 모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이야기는 점점 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전개됩니다. 자꾸만 들려오는 환청, 밤마다 나타나는 수상한 그림자, 죽은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인물들의 트라우마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관객은 ‘진짜 유령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포와로와 함께 품게 됩니다. 하지만 포와로는 끝내 사건의 실체가 '사람의 죄의식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 임을 추리로 밝혀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 짓습니다.

사건의 진실은 상상 이상의 복합적인 감정과 사연이 얽힌 결과였고, 그 중심에는 슬픔, 죄책감, 용서받지 못한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단순한 추리극을 넘어,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의 고통, 남겨진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인간 내면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유령보다 무서운 인간의 심리

에르퀼 포와로(케네스 브래너)는 은퇴 후에도 명성을 잃지 않은 전설적인 탐정으로, 이번 사건에서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논리와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점점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그는 냉철한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았지만, 점차 자신도 어쩌면 신을, 혹은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싶어 한다는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조이스 레이놀즈(미셸 여)는 유명한 심령술사로, 어두운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의식은 단순한 연기가 아닌, 진심 어린 소통의 시도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작과 진실이 뒤섞인 위험한 감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로웨나 드레이크(켈리 라일리)는 사건이 벌어진 궁전의 주인이자 비극적인 사연의 중심인물입니다.. 딸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살아가며, 죄의식과 집착 사이에서 무너지는 어머니의 복합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아리아드네 올리버(티나 페이)는 포와로의 친구이자 작가로, 이번 사건의 목격자이자 동반자입니다. 날카로운 지성과 풍자적 태도로 극의 긴장감을 완화하면서도, 진실을 향해가는 여정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외에도 다층적인 서사를 지닌 조연들이 각자의 트라우마와 감정을 품고 등장하며, 마치 연극 무대 위의 인물들처럼 궁전이라는 닫힌 공간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갑니다.

고딕 미스터리와 심리극의 절묘한 조합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기존 추리영화와는 결이 다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특유의 ‘밀실 살인’과 ‘다중 용의자’ 구조를 따르면서도, 이번 작품에서는 심령술이라는 초자연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몰입감을 강화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베니스를 배경으로 한 비주얼입니다. 수세기 된 궁전, 좁은 골목과 운하, 물안개가 자욱한 밤, 유령과 어린아이의 속삭임, 조명과 그림자를 교차시키는 연출은 단순히 배경을 넘어서 스토리 자체의 공포와 미스터리를 배가시키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또한 포와로의 내면 변화는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단순히 범인을 찾는 것을 넘어, 포와로 스스로가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심리적 깊이가 인상적입니다. 과연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추리물의 구조를 넘어, 관객 각자에게 던지는 화두가 됩니다.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에르퀼 포와로 시리즈 중 가장 낯설고도 신선한 영화입니다. 유령과 환청, 고딕풍 궁전과 밀실 구조, 모든 것이 전형적인 공포물처럼 시작되지만, 끝내 이 모든 불안을 걷어내는 건 역시 사람의 이야기, 인간 내면의 고통과 갈등이라는 점에서 기존 추리극 이상의 울림을 전합니다.

에르퀼 포와로는 여전히 범인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하지만,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믿음과 상처, 인간적인 불안을 직면합니다. 이 영화는 한 명의 탐정이 또 한 번의 사건을 해결했다는 성취감이 아닌, 그가 사람들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성만으로는 풀 수 없는 삶의 복잡함을 인정했다는 데 진짜 감동이 있습니다.

살인을 풀어낸 영화가 아니라, 삶을 들여다본 미스터리.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드라마와 인간 심리를 탐구하는 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길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