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개봉한 영화 '모털 엔진(Mortal Engines)'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피터 잭슨이 제작에 참여하고, 필립 리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SF 판타지 영화입니다. 핵전쟁 이후 문명이 붕괴된 수백 년 후의 지구를 배경으로, 인간의 생존 방식이 완전히 뒤바뀐 세계를 그립니다.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설정은 ‘이동하는 도시’ 개념입니다. 도시들이 바퀴를 달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약한 도시를 포식하는 모바일 도시 생태계는 전례 없는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영화는 이 거대한 설정 속에서 두 청년의 성장과 반란, 그리고 인류의 존엄성 회복을 중심으로 감성적인 드라마와 화려한 액션을 펼쳐냅니다.
포식 도시 런던, 그리고 시작되는 반란
이야기는 대기굴절전쟁(Sixty Minute War) 이후의 세상에서 시작됩니다. 핵무기를 포함한 첨단무기들이 세계를 파괴한 후, 생존한 인류는 지구의 자원을 찾아 떠도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이동하는 도시들’이 존재합니다. 대륙 기반의 고정 도시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이제는 거대한 기계도시들이 지면을 굴러다니며 약소 도시들을 삼켜 생존을 이어갑니다.
이 거대 도시는 런던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런던은 끊임없이 다른 도시를 포획해 자원을 흡수합니다. 이 시스템을 이끄는 자는 런던의 역사학자이자 권력자 테데우스 발렌타인(휴고 위빙)입니다. 그는 ‘고대 무기’를 되살리기 위해 고대 문명의 잔재를 수집하며, 궁극적으로 지배 체제를 완성하려 합니다.
이런 런던을 무너뜨리기 위한 한 소녀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헤스터 쇼(헤라 힐마)는 어릴 적 어머니를 살해당하고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후, 복수심을 품고 홀로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녀는 발렌타인을 향해 칼을 겨누지만 실패하고, 도중에 런던 출신의 젊은 역사학도 톰 내츠워디(로버트 시한)와 함께 런던에서 추방됩니다.
톰과 헤스터는 뜻하지 않게 협력하게 되고, 여정을 통해 런던의 음모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들은 반(反)포식 도시 연합 세력인 Anti-Traction League와 접촉하며, 고대 무기 ‘메두사’를 되살리려는 발렌타인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전면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영화는 헤스터와 톰이 각자의 상처와 목적을 넘어서, 인류 전체의 운명을 걸고 싸우게 되는 여정을 그립니다.
얼굴에 흉터를 지닌 복수자, 무너져가는 이상주의자
헤스터 쇼(헤라 힐마)는 이 영화의 감정적인 중심축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얼굴에 큰 흉터를 입은 채 성장한 그녀는 내면의 상처와 외면의 흠을 동시에 지닌 캐릭터입니다. 복수를 위해 살아왔지만, 톰과의 만남 이후 처음으로 타인을 믿고, 더 큰 정의를 위해 싸우게 됩니다. 헤라는 단순히 강한 여성 캐릭터를 넘어서,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고독한 존재의 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합니다.
톰 내츠워디(로버트 시한)는 런던의 역사학도이자 이상주의자입니다. 처음에는 발렌타인을 존경했지만, 진실을 목격한 뒤에는 자신의 가치관을 뒤엎고 진정한 정의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지적이고 유약한 인물이지만, 모험 속에서 점차 용기와 판단력을 갖추며 성숙한 주체로 성장합니다.
테데우스 발렌타인(휴고 위빙)은 영화의 주요 악역으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캐릭터입니다. 그는 런던의 부흥을 위해 고대 무기를 복원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과 권력 집중을 정당화합니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악이 아니라, 타락한 이상주의자의 전형이며 휴고 위빙은 특유의 중후한 연기로 설득력 있는 악인을 완성합니다.
그 외에도 헤스터를 인간으로서 되돌리고자 하는 사이보그 전사 슈라이크, 자유 연합의 리더 안나 팡, 그리고 다양한 포식 도시의 구성원들은 세계관을 풍성하게 만드는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폐허 위에서 다시 묻는 문명과 인간의 방향성
영화 '모털 엔진'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독창적인 세계관입니다. 수백 년 후, 도시들이 거대한 기계 위에 설치되어 이동하며 서로를 삼키는 ‘포식 도시’라는 설정은 지금까지의 어떤 SF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과감하고 참신한 상상력입니다. 특히 런던이 하나의 기계도시로 묘사되어 다른 도시를 추격하고 흡수하는 장면은 스펙터클한 스케일과 함께 시각적 충격을 줍니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히 배경을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의 중심 갈등과 메시지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기 때문에 관객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은 거대한 설정 속에서도 인물 중심의 서사를 놓치지 않습니다. 주인공 헤스터 쇼는 단순한 SF 히어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한 인간으로서 그려집니다. 그녀는 복수를 동력으로 움직이지만, 여정 속에서 톰이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감정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는 낯섦과 불신으로 시작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과정 속에서 점점 더 깊어지며 인간적인 드라마로 발전합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극한의 세계 속에서도 따뜻한 감정과 신뢰, 연대의 힘이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단순한 오락적인 재미를 넘어 문명과 윤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자원을 둘러싼 도시 간의 생존 경쟁은 현실의 자본주의와 국제 질서에 대한 은유처럼 다가오며, 강자가 약자를 흡수하며 생존하는 구조는 단순한 설정이 아닌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테데우스 발렌타인이 고대 무기 메두사를 되살려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명분 아래 파괴를 정당화하는 모습은, 이상주의가 어떻게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작용합니다. 반면, 헤스터와 톰, 그리고 반포식 도시 연합이 선택하는 길은 공존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문명의 시작을 상징하며 관객에게 보다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모털 엔진'은 단순히 큰 도시가 움직인다는 ‘아이디어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간 문명이 파괴된 후에도 여전히 욕망, 권력, 정의, 그리고 희망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선택과 책임을 묻는 진지한 이야기입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도 결국 인간의 본성, 감정, 연결은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영화는 전하고 있습니다. 헤스터와 톰, 그리고 반포식 도시 연합의 인물들은 우리에게 문명의 방향을 되묻게 만들며, ‘크고 강한 것이 옳은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모털 엔진'은 한 번쯤 볼 가치가 있는 철학적 SF입니다. 스펙터클한 영상과 감성적인 내러티브, 그리고 독특한 세계관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SF 장르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것입니다.